지금 서울을 구분하는 기준은 한강이다. 한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울을 가르는 기준은
한양도성의 안과 밖이었다. 그러면 사대문안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지역을 꼽으라면 어디일까? 단연코 종로이다. 지금 종로의 인사동
중앙빌딩에는 서울의 중심을 알리는 표지석이 한쪽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이 종로의 위상이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왜 그럴까? 을지로의 등장 때문이다.
더존을지타워 을지로의 시작점
을지로는 예전, 일제 강점기에는 ‘황금정(黃金町, 고가네 마치)’이라 했다.
조선시대에 이곳은 큰 고개가 있었는데 땅이 질고 붉어 마치 구리가 햇빛에 반사되는 것 같다고
구리개라고 했고, 갑오개혁 이후에는 구리 동(銅)자를 써서 동현(銅峴)이라 했다. 그럼 이곳을
을지로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해방되고부터이다. 을지로 근방 수표교 일대에 일제 때에
차이나타운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그들의 기세를 제압하고자 중국 수나라 100만 대군을 물리친
을지문덕 장군의 이름을 따서 을지로라 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은 북촌, 주로 종로, 구도심으로, 청계천 남쪽은 남촌, 황금정(을지로)으로 나뉘었고 이곳에 일본사람들이
거주하며 그들의 문화와 산업이 이식되며 가장 핫한 지역이 되었다. 지금의 신시가지,
강남과 같은 위상이라고 할까? 이 을지로를 처음 시작하는 곳에 시청이 있고 시청 옆 첫 건물이
더존을지타워이다.
1977. 9. 20 종로, 을지로, 남대문로 일대(출처: 서울역사박물관)
더존을지타워 주변의 모습을 살펴보자
1995. 50년대 을지로(출처: 서울시 사진기록화사업 1995)
더존을지타워의 주변을 꼼꼼히 보자! 뭔가 다르다. 현대식 건물의 사이사이로 다른 양식의 건물들이 즐비하다. 더존을지타워 바로 옆에 있는
시청 별관(구 미문화원, 미쓰이물산 경성지점)도 오래된 석조 건물이요, 시청사 앞 서울도서관으로 쓰이는 구 시청건물은 범상치 않은 이 지역
에 중량감을 더한다. 그뿐인가! 시청 앞 광장 둥근 원을 따라 태평로 쪽에는 덕수궁, 소공동 쪽에는 기와로 된 문 뒤에 원구단이 있다. 원구단
옆으로는 소공로가 쭉 뻗어있다. 그러고 보니 시청의 둥근 광장을 중심으로 소공로, 을지로, 태평로가 방사형으로 쭉 뻗은 것이다. 아! 이곳이
서울의 진짜 중심이구나! 을지로의 시작점이요, 소공동으로 가는 길목이요, 남대문과 광화문으로 가는 서울의 중심 중의 중심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청 앞 광장에는 회전식 교차로가 있어 교통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한문 앞 - 1897에서 1919로 대한민국의 출발점
지금 덕수궁 앞을 지나면 대한문에서 수문장 교대식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몰리는 볼거리이다. 그런데 이곳은 대한제국 시기 많은 유생과
백성이 민의를 전달하는 광장의 역할을 했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 露館播遷)한 이후에 정동의 한복판에 있는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고종은 이곳에서 생을 다 할 때까지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곳은 조선의 최고 통치자가 거하는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였다. 대한문 앞
광장은 유생들이 왕에게 직언하는 곳이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된 뒤에 수많은 군중
이 몰려와 토론으로 밤을 지새우는 만민공동회의를 연 민의수렴 장소이기도 하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의 붕어는 3.1운동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근대 대한민국의
시작점이라 할만하다.
대안문을 지나는 어가행렬(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시청 앞 광장- 1987에서 2020으로 역사의 중심 공간으로
영화 ‘1987’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시청 앞 광장이 클로즈업된다. 이 시청 앞 광장에 모인 수많은 시민의 구호와 열기가 나라를 깨워 민주주의를 이뤄냈다.
그런데 10여 년 후 이곳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된다. 2002년 서울에서 개최된 한일월드컵에 의해서이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그날의 함성을 잊지 못한다. 아니 20년 전에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곳이었다. 그때 시청 앞 광장 대형스크린 앞에는 밤을 새며 대한민국을 외쳤던 시민들이 있었다. 이 흥겨운 축제를 즐기기 위해 축구경기와
관련 없는 외국인들도 모여들었다. 태극기가 패션이 되고 애국가가 누구나 흥겨워 부르는 대중가요가 되어 무겁고 엄숙했던 민주투쟁의 장소가 흥에 겨운 축제의 장소로 변모되었다.
그래서 시청 앞 광장은 우리의 역사적 콘텐츠가 쌓인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보고이다.
을지로 꿈과 낭만의 시작점
을지로 4가의 간판들(출처: 서울 중구청)
더존을지타워가 시작되는 을지로는 아직도 해방과 6.25 이후에 건축된 수많은 건물이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근대 서울의 모습을
추억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이다. 지금의 을지로3가 쪽의 상가들은 서울을 재건하기 위해 들어선 조명과 타일도기, 전기, 공구, 가구 등
특성화된 거리로 자연스럽게 조성되었다. 전쟁 이후 서울의 주요 간선도로변에 당시로써는 고층인 4, 5층짜리 건물을 많이 들어섰다.
그 이면에 있던 낙후된 주택가에는 간선도로변 상가에서 파는 물건들을 생산하는 공장들이 우후죽순 들어서며 을지로만의 새로운 모습을
창출되었다. 이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즐겨 찾던 음식점들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노포를 모두 열거하기도 벅찰 정도이다. 아직도 을지로
건물에는 ‘빌딩’이 아닌 ‘삘딍’이라는 건물 이름이 있고, 각기 다른 모습의 정초석들이 수두룩하다. 이 지역의 이 건물들, 이 손글씨 간판들은
우리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꿈과 낭만의 시작점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더존을지타워- 첨단 ICT가 선도하는 미래 산업의 중심
이 모든 역사와 문화의 시작점에 더존을지타워가 있다. 이곳에는 얼마나 많은 역사의 증인들이 지나쳐갔을까?
덕수궁 앞 대한문 고종의 장례행렬을 보기 위하여 힘없는 백성들이 지나갔을 것이고 일제 강점기에는 잘 차려입은 모던걸과 모던보이들이
활보하였을 것이다. 6.25 때는 군인들이, 1980년대에는 일군의 청년, 대학생들이 뛰어갔을 것이다. 2000년대 초에는 대한민국을 외치는
월드컵 응원물결이 뒤덮었다. 이제 이곳 더존을지타워는 주요 공공기관 및 금융권, 국내외 유수 기업 등이 밀집한 서울 을지로 중심업무지구의
한 가운데에서 플랫폼 비즈니스, 빅데이터, 인공지능, 클라우드, 블록체인, 핀테크 등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주도하는 첨단 ICT 기술을 기반으로
미래지향적 비즈니스 생태계를 주도하는 중심 공간으로서 전국으로, 세계로 뻗어 나갈 것이다.